특정 설계자산(IP)에 종속된 락인효과 딜레마, 경쟁력 확보 위한 투자 필요

사진은 화웨이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기린980 AP, ARM의 Cortex-A 설계자산(IP)

- 오픈소스 아키텍처 RISC-V 주목, 비용·시간 줄이고 쉽게 IP개발도 가능

[IT비즈뉴스 최태우 기자] 미중 간 무역전쟁 여파로 미 상무부가 화웨이와 68개 계열사를 거래제한 기업 명단에 올린 지난달 16일, ARM이 내부문서를 통해 임직원에게 화웨이와 자회사 간 사업 중단을 지시했다는 보도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해당 사건은 보도 이틀 전인 구글의 안드로이드 OS 지원중단 소식에도 자체OS인 훙멍(Hongmeng)으로 큰 영향이 없다고 장담했던 화웨이를 옥죄는 핵심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삼성전자에 이어 스마트폰시장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화웨이는 자사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기린(Kirin)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 ARM의 설계자산(IP)을 사용하고 있다.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에서 개발한 AP '기린980'의 경우 ARM의 CPU/GPU 코어인 코어텍스(Cortex), 말리(Mali)를 베이스로 자체 개발한 신경망프로세스(NPU)가 탑재된다.

IP는 반도체 설계를 위한 '설계도'다. 설계도를 받지 못하면 기업은 칩을 만들 수 없다. 스마트폰 구동 SW는 자체OS로 방어한다고 해도 칩 설계도를 받지 못하면 칩 생산자체가 힘들어진다.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는 화웨이 스마트폰 출하량이 전년비 24% 급감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이는 스마트폰 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웨이의 가장 큰 사업부문인 통신장비 설계 부문에도 모바일 AP에 절대다수로 탑재되는 ARM IP에 특화됐다. 전체 사업부문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팹(Fab) 하나 없는 ARM이 모바일 칩 설계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생긴 락인(lock-in) 효과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문제가 화웨이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대상이 삼성전자나 퀄컴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모바일 시장 활성화로 날개 단 ARM, 모바일시장 90% 장악
영국에 본사를 둔 칩 설계기업인 ARM은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 칩 생산을 위한 설계자산(IP)만을 공급하고 있다.

ARM은 리스크(RISC) 아키텍처를 사용한다. 축소명령어집합컴퓨터의 약자인 RISC는 명령어 개수를 줄인 단순한 구조를 띈다. 일반PC와 서버에 탑재되는 시스크(CISC) 아키텍처와 달리 전력소모가 적다.

스마트폰시장이 본격 열리기 시작하면서 저전력 대비 높은 퍼포먼스로 ARM의 IP를 활용한 칩 설계가 늘었다. 시스템반도체 개발을 위해서는 많은 연구인력과 시간, 비용이 투자된다. 기업이 일일이 개발하는 것보다 기술·시장 트렌드에 부합하는 범용 IP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RISC 아키텍처를 활용하는 기업·칩은 ARM 뿐만은 아니다. 밉스(MIPS)나 스팍(SPARC)도 RISC를 활용한다. 현재 RISC 칩 설계시장에서 ARM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0%를 넘어선다.

스마트폰을 넘어 스마트팩토리, 스마트카(커넥티드카), 스마트시티 인프라 등 노드·단말의 연결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산업용 IoT(IIoT) 시장에서의 파급력은 더 커진다. 소프트뱅크가 2016년 7월 ARM을 320억달러에 인수한 점은 성장가능성을 높게 봤기 때문이다.

ARM은 전체 반도체 설계자산(IP) 시장에서 48%,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에서는 9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쉽게 종속되는 락인(lock-in)의 딜레마
화웨의 사례에서 보듯, 문제는 관련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ARM이 IP 공급을 거부하면 IP를 공급받아온 기업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AP 구동에서 핵심으로 자리하는 CPU 코어(ARM의 경우 Cortex) IP 기술력을 확보 못하면 칩 설계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

물론 ARM만 RISC 코어 IP를 만들지는 않는다. 타사도 RISC 칩을 설계하고 있다. 또 화웨이 자체적으로 기술개발에도 나설 수 있다.

허나 그간 동시대 업계에서 요구되는 범용성을 기준으로 IP설계에만 집중해 온 ARM의 아키텍처와 기술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체 개발에 나선다 해도 막대한 비용, 시간이 소요된다. 설계에서 검증, 테스팅 문제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락인효과다.

시스템반도체 기술 경쟁력 확보는 비단 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부도 시스템반도체 비전·전략을 발표하고 기술력 확보를 위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전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한국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3%대에 불과하다. 국내 팹리스 기업 중 매출 1천억원이 넘는 곳은 6개사에 불과하다.

전문인력도 부족한 상황이다. 정부도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해 10년 간 1조원을 투입, 범부처간 협력을 바탕으로 1만7000명의 인력양성에 나설 계획임을 밝힌 바 있다. 가격이 비싸 소규모 팹리스기업에서 사용하기 힘들었던 설계툴(EDA)을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 구축에도 나서고 있다.

기업 자체적인 입장에서도 대규모 투자를 통한 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비메모리반도체 경쟁력 확보로 2030년 시장 1위를 목표로 내걸고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연구개발(R&D) 부문에 73조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5000명을 양성한다는 목표다. 자체 보유하고 있는 IP(인터페이스, 아날로그, 보안)도 국내 팹리스기업의 제품 경쟁력 강화 및 개발기간 단축을 목표로 제공하면서 관련 생태계 확장도 추진할 계획이다.

◆RISC-V 주목…집단지성 '오픈소스' 활용하는 것도 대안
자체 여력이 힘든 팹리스·시스템 개발 기업의 경우 오픈소스로 공개된 IP를 활용할 수도 있다. 2015년 공식 발족한 리스크-V(RISC-V) 파운데이션에서는 반도체를 위한 개방형명령어집합(Instruction Det Architecture, ISA)를 오픈소스로 무료 개방하고 있다.

2010년 미국 UC버클리대학교에서 최초 개발됐으며 저전력 임베디드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적합한 코어 설계가 가능해 ARM을 대체할 유력한 아키텍처로 주목받고 있다. 뒤의 'V'는 UC버클리대학에서 개발한 5세대 메이저 버전이란 뜻이다.

로열티 없이 BSD(Berkeley Software Distribution) 라이선스 안에서는 공개된 소스를 변형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ARM의 상용IP의 경우 ISA가 폐쇄형으로 오픈돼 있지 않다. 개발자가 애플리케이션 구현을 위해 사용하고픈 IP만 선택, 코어 설계도 가능한 셈이다.

RISC-V 코어에 대한 국내 임베디드 시스템 개발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10월 한국지사를 공식 오픈한 사이파이브(SiFive) 주최로 17일, 18일 양일 간 대전과 판교에서 진행된 '사이파이브 기술 심포지엄'에는 약 250여명의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사이파이브는 RISC-V를 활용해 맞춤형 코어, 시스템온칩(Soc) IP 라이선싱 기업이다. RISC-V를 최초 개발한 UC버클리대학 출신 연구진 3인이 설립한 기업으로 삼성전자, SK텔레콤, 퀄컴벤처스로부터 투자를 받기도 했다. 공동창업자중 한 명인 이윤섭 박사가 현재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고 있다.

18일 판교 반도체산업협회회관에서 열린 '사이파이브 기술 심포지엄'에서 IAR시스템즈코리아 이현도 과장이 IAR임베디드워크벤치에 최근 업데이트된 RISC-V 코어에 대한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ITBizNews DB]

포럼 현장에서는 RISC-V 재단 회원사와 협력기업들이 RISC-V를 활용한 애플리케이션 개발사례도 다수 공개됐다. 국내 AI스타트업인 퓨리오사AI는 NPU 설계에 RISC-V를 활용한 사이파이브 코어를 사용하고 있다. 램버스도 보안설계를 위한 RoT(Root of Trust) 설계 부문에서 RISC-V를 활용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이윤섭 박사는 “오픈소스 기반의 RISC-V의 활용 상 이점은 반도체 기획에서 설계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점”이라며 “집단지성을 활용한 오픈소스를 활용할 수 있고, 내가 필요한 코어만 선택할 수 있으며, 1백여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들이 재단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는 만큼 시장영향력은 더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버티컬 마켓에 최적화된 코어들도 상당수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마이크로칩, 웨스턴디지털 등 재단에 참여하고 있는 반도체기업들 다수가 주기적으로 코어 IP를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있다. NXP반도체, 퀄컴, 마이크론과 같은 반도체기업과 구글, IBM, 삼성전자, 화웨이 등이 재단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를 위한 에코시스템도 중요한 부분이다. 개발자가 기존의 툴이나 코드를 활용할 수 있는 개발환경이 선택의 중요변수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윤섭 박사는 “개발보드는 물론 디버거, 소프트웨어 스택 등 기존 실리콘기업들이 제공해왔던 통합개발환경 수준은 확보된 상태”라고 말했다.

대다수 개발자가 사용하고 있는 프리RTOS(FreeRTOS), 제퍼(Zephyr) OS를 지원하고 있으며 세거(Segger)의 임베디드스투디오, 라우터바흐(Lauterbach)의 트레이스32, IAR시스템즈(IAR Systems)의 임베디드워크벤치 등의 상용 컴파일러 툴 모두 RISC-V 코어를 지원하고 있다.

이윤섭 박사는 “코어개발 사례가 다수 확보되면서 협업하고 있는 기업들도 늘어난 것도 사실”이라며 “글로벌 기업들이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생태계가 확장되는 만큼, RISC-V가 비교적 저렴한 비용, 빠른 시간 내에 IP를 확보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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