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과감히 대기업을 박차고 스타트업으로 향하는 이들은 용기와 혁신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안정된 조직의 틀을 벗어나 불확실하지만 가능성으로 가득한 무대로 옮기는 일은 멋진 모험이었다.
허나 최근 몇 년새 이같은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모습이 감지된다.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을 발판으로 다시 대기업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토스,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등 국내 대표 스타트업 출신들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KB금융, CJ, LG유플러스 등 전통 대기업의 디지털 전략 부문이나 신사업 조직으로 스카우트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 스타트업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대형 유통사의 데이터 플랫폼 총괄로 합류했는데, 스타트업 시절 직접 제품을 기획하고 시장에 빠르게 적용했던 실행 중심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받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스타트업의 UX디자이너 출신이 금융 대기업의 디지털전환 프로젝트에 합류해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 문화를 이식한 경우도 있다. 스타트업의 기민한 실행력과 시장 감각이 이제는 대기업 혁신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같은 흐름은 대기업의 인재 전략의 변화로도 읽힌다. 과거 대기업은 검증된 경력과 조직 적응력 등을 중시했지만 이제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 중심의 사고를 가진 인재를 찾기 시작했다. 내부 혁신은 더 이상 내부 인력만으로 수월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디지털전환(DX), 인공지능(AI), 플랫폼 전략 등 신사업 영역에서는 스타트업식 접근이 필수적이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인수하거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을 설립해 외부 생태계를 흡수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스타트업 출신 인재는 대기업이 새로운 성장 엔진을 장착하기 위한 촉매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스타트업 출신이 대기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단순히 스카웃 제안을 받는 것과 그 안에서 커리어를 확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먼저 필요한 것은 조직의 언어를 배우는 태도다. 스타트업은 ‘생각→실행→수정’의 속도가 빠르지만 대기업은 ‘기획→검토→조율→실행’의 단계를 거친다. 이 구조를 답답하게 느끼면 오래 견디기 쉽지 않다.
스타트업에서 배운 민첩함을 유지하되 조직의 리듬 안에서 설득과 합의를 만들어내는 지구력이 요구되고, 단순한 적응을 넘어 조직의 언어를 번역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성과를 구조화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스타트업에서는 문제 해결이 곧 성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기업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KPI와 연결되는지가 중요하다.
가령 ‘신규 기능의 빠른 출시’보다 ‘출시를 통한 전환율 상승치 및 목표 대비 결과’와 같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데이터(숫자)가 필요하다. 데이터와 지표로 설명하는 습관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리더십의 방향을 바꾸는 일 또한 중요하다. 스타트업의 리더십이 ‘내가 직접 움직이는 힘’이었다면 대기업의 그것은 ‘다양한 부서와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힘’에 가깝다. 특히 스타트업에서 가파른 성장을 이끌었던 실무형 리더였다 하더라도, 대기업에서는 협업과 보고, 정책을 아우르는 관계형 리더십으로 진화해야 한다.
더 디테일한 측면에서 요구되는 준비물도 있다. 가장 먼저 포트폴리오의 재구성이다. 스타트업 시절의 성과가 단순히 서비스의 성장 정도였다면, 대기업에서는 구조화된 문제 해결 과정을 중시한다.
그렇기에 ‘문제 정의–가설–실행–성과–교훈’의 흐름으로 포트폴리오를 다시 정리해야 하고 제품의 성장뿐 아니라 의사결정의 논리, 협업의 과정, 데이터 기반 판단을 강조하는 편이 유리하다.
네트워크의 확장도 필요하다. 스타트업은 네트워킹이 수평적이고 비공식적이었다면 대기업은 공식적 루트가 우선이다. 전직 스타트업 동료뿐 아니라 대기업 인사담당자·컨설턴트·산업 내 전문가들과의 폭넓은 접점이 필요하다.
특히 대기업의 디지털전환 프로젝트나 사내벤처 프로그램에 외부 자문으로 참여하는 방식은 진입의 기회를 만든다.
커뮤니케이션의 리듬 조절도 요구된다. 스타트업에서는 빈번한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즉각적인 결정이 일상이지만, 대기업에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만큼 템포 자체가 다르다.
보고서·회의·메일을 통해 자신이 한 일을 문서화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아이디어보다 프로세스, 실행보다 정리가 중시되는 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
최근 이같은 일련의 흐름이 등장한 것은 대기업 입장에서도 반가운 변화다. 외부에서 단련된 스타트업형 인재는 내부 혁신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들이 너무 빨리 조직에 흡수되거나 기존 관행에 짓눌리지 않도록 도전과 실험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제다. 몇몇 대기업은 이미 스타트업 출신 인재 전용 트랙을 구축하거나 내부 사내벤처 조직을 강화해 그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며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에 나서고 있다.
‘커리어의 방향’보단 ‘커리어의 깊이’를 쌓는 시대다. 이직의 목적은 안정이 아니라 영향력의 확장으로 바뀌고 있다. 어디에서 일하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느냐가 더 중요한 해결과제다. 스타트업에서 학습하고 경험한 속도와 실행력, 여기에 대기업이 가진 자본과 시스템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리더십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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