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관리 부재, 악재 한 방에 넉다운
슬로모션 금융위기 발생 가능성 경고

미국 메사추세츠주 웰즐리 소재 실리콘밸리뱅크 지점 [사진=EPA]
미국 메사추세츠주 웰즐리 소재 실리콘밸리뱅크 지점 [사진=EPA]

미국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으로 촉발된 불안감이 진정되는 모습이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발빠른 대응에 나서면서 극도의 공포감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시장 안정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평가되지만, 지난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촉발한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의 전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번 위기의 도화선은 SVB의 파산이다. 미국 16위의 대형 은행이 유동성 위기가 불거진 후 단 이틀만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시장에 충격과 공포를 안겼다. 특히 SVB는 실리콘밸리의 기술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VC)을 주요 고객으로 하면서 성장한 은행으로 기술 산업에 큰 충격을 안겼다.

SVB 파산에 대한 미국 상·하원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파산요인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고 있는데, 금융기업이 아닌 기업에게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지적도 적지 않다. 실제로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한 마이클 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부의장은 “SVB의 실패는 관리 부실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장 크게 지적된 부분은 위기관리 시스템의 부재다. SVB의 파산의 직접적 원인은 420억달러의 예금이 단기간에 빠져나간 뱅크런으로, 이를 촉발한 것은 장기 채권 투자에서 대규모 손실이다.

장기 국채는 가장 안전한 자산 중 하나로 꼽히지만, 문제는 지나치게 많은 자금이 장기 채권 투자에 집중됐다는 점이다.

SVB는 고객 예금의 절반 이상(55%)을 장기 국채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집중은 기준 금리의 가파른 상승에 따른 채권 가치 하락의 충격을 SVB가 더욱 크게 맞게 되는 원인이 됐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라는 위험 관리의 오래된 격언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이는 위험관리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CNN은 최근 8개월간 SVB의 최고위험관리책임자(CRO) 자리가 공석이었다고 보도했다. 연준의 공격적 금리인상이 진행된 지난 1년간 CRO가 부재했던 것이다. CRO 부재 속에서 정상적인 위험관리 시스템의 작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고객군의 집중도 SVB의 취약요소로 지목된다. SVB의 고객은 실리콘밸리 지역의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에 집중돼 있었다. SVB를 차별화하고, 유명하게 만든 독특한 부분이지만, 전례없는 금리인상이라는 상황에서는 이는 위험으로 작동했다.

SVB의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은 금리에 극도로 민감하기에 고금리 상황에 대응하는 위험관리가 요구됐으나, 이 시기 SVB에는 CRO가 없었다. 이에 더해 SVB 예금의 97%는 비보험예금으로 공포가 쉽게 뱅크런으로 전이됐다.

흥미로운 점은 급격한 성장이 SVB가 가진 위험요소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급속 성장의 위험은 전통산업 분야에 비해 폭발적 성장기회가 많은 테크 기업과 스타트업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SVB는 1983년 설립된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스타트업 성공과 함께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2018년에서 2021년 사이 SVB의 자산은 약 4배 늘었고 2022년 말에는 자산 규모(2,090억달러) 기준 미국 16위의 대형은행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 속에서 경영진의 역량과 위험관리와 같은 내부 시스템도 함께 성장해야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이뤄내는 기업은 많지 않다. 기업의 역량과 시스템이 비즈니스 성장과 일치되지 못한다면 이는 곧 치명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위험요소가 될 수 있으며 SVB의 몰락은 이를 증명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스타트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스타트업의 급속한 성장은 무척 매력적이지만, 이에 따라 운영비용 증가는 물론 인력 관리의 어려움도 함께 늘어난다.

시장 수요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투자가 요구되지만 투자증가는 곧 리스크의 증가로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며, 성장 시장을 노리면서 새롭게 참여할 경쟁자들에게도 대응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초기 성장을 이뤄낸 기업 문화의 부정적 방향으로의 변질, 인력·품질 관리 실패로 인한 제품·서비스 품질 저하, 혹은 혁신성 저하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내부 관리 시스템을 확립하지 못해 회계부정 등의 사고가 발생하거나 위기 관리에 실패해 단숨에 사라질 수 있다. 금융기업이 아닌 테크 기업과 스타트업에서도 SVB의 붕괴 원인을 면밀히 살펴야 할 이유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사진=로이터]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사진=로이터]

각국 금융당국의 빠른 대처로 조기 진화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경계감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FED에 따르면, 3월16일부터 22일까지 1주일간 미국 상업은행에서 1,257억달러(약 165조원)의 예금이 인출되는 등 불안감이 완전히 진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격한 기준금리 인상이 가져온 금융 환경의 급변, 이로 인한 소규모 은행의 유동성 위기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슬로모션 금융위기'의 발생 가능성을 경고했다. 각국 금융당국의 적극적 대응으로 급한 불을 진화했지만 서서히 진행되는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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